주제는 "짝사랑" 이었습니다.
주말에 본가에 오면 편히 쉬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케이토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만나고 싶었던 친구들을 만나고, 사는 이야기도 하고,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냈던 유메노사키 학원에도 잠깐 들렀더니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질 시간이었다.
그는 학원 앞 번화가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따뜻한 음료를 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날씨가 추웠다. 여러 사람들과 떠드느라 금세 꺼져버린 배도 채우고 차갑게 굳은 손도 녹이기 위해서 산 음료는, 역 앞까지 걸어오면서 쉴새없이 홀짝인 덕에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더 음료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두 손으로 감싼 컵을 살살 흔들며, 그는 역 근처의 횡단보도에 섰다. 이 횡단보도를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역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전차를 탈 수 있다. 케이토는 차분히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찬 바람에 몸을 움츠렸던 케이토가 바뀐 신호에 횡단보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 사이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습관처럼 미간을 찡그린 채 대충 두른 목도리를 여미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본 케이토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키류!"
"어, 하스미?"
이름이 불린 남자-쿠로가 케이토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잠깐 걸음을 멈춰섰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곁에 나란히 선 케이토가 깜빡이는 녹색 신호등을 가리키며 그와 함께 신호가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무심코 쿠로의 팔뚝을 잡고 있다는 걸 알아챈 케이토가 흠칫하며 손을 뗐다. 머쓱해진 손은 다시 따뜻한 종이컵을 감쌌다.
"정말 오랜만이네."
"그래, 졸업식 이후로 처음인가. 대학 가고 적응하랴 수업 들으랴 과제하랴 방학에도 바빠서 차마 연락할 틈이 없었다. 미안하다, 키류. 절대로 잊어버린 게 아냐."
"뭘 미안하기까지."
쿠로가 픽 웃었다. 목도리 틈으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반대쪽 손에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발견한 케이토가 말을 꺼냈다.
"들고 있는 건..."
"아, 장을 좀 봤어. 이 근처 마트가 채소가 싱싱하길래..."
"너희 집, 여기서 거리가 제법 되지 않던가?"
"그렇지."
"그런데 이 추운 날에도 걸어서 여기까지 왔나?"
"운동 삼아서 자주 걸어다녀. 근데 오늘은 좀 춥긴 하네."
"여전하군, 너도."
탈것이 싫다며 조금 먼 거리라도 걸어다니는 것을 선호했던 쿠로는 일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음가짐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게 있다면, 추운 날씨에는 목도리를 하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 정도다.
"이제는 목도리 정도는 하고 다니는군."
"번거롭긴 하지만, 추우니까 해야겠더라. 게다가 선물로 받았으니까 더 열심히 하고 다녀야지."
악의 없는 쿠로의 말에 케이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흥,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다. 네놈은 항상 교복 자켓도 셔츠도 풀어헤치고 다니니까 더 추워 보였다고. 이제는 단단히 잠그고 다니는군. 그러고 있으니까 훨씬 따뜻해 보여."
"춥더라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하하."
"고작 한 살 더 먹었으면서 아저씨처럼 말하지 마. 여전히 구제 불능이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케이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쿠로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좀 들어줄까?"
"아니, 괜찮아. 별로 안 무거워서. 너야말로 어깨에 멘 가방 안 무겁냐?"
"그다지. 안에 별거 안 들었거든. 안에 든 것중에 전차로 오가면서 읽을 작은 책이 제일 무거울걸."
케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쿠로가 케이토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대학 가더니 패션 센스가 좀 늘었네."
"흥, 원래부터 이 정도는 입었다."
"줄무늬 셔츠에 줄무늬 넥타이를 메고 나온 건 누구였더라."
"그, 그건 얼른 잊어버려."
"대학 가서도 그러고 다닐까봐 걱정했는데, 그러진 않은 것 같구만. 너한테 잘 어울려, 그 스타일. 세련돼 보이고."
"너...!"
장바구니를 들지 않은 손으로 쿠로가 케이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케이토가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신호가 바뀌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케이토가 잰걸음으로 쿠로를 쫓았다. 다시 나란히 거리를 걸으며, 이번에는 쿠로가 먼저 물었다.
"근데 어딜 가길래 그렇게 빼 입고 나왔냐? 데이트?"
데이트, 라는 말에 케이토의 눈썹이 꿈틀했다. 쿠로는 앞을 보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 과에서 제법 인기는 있었지만, 케이토는 일을 선택할지언정 여자친구를 만들지는 않았다.
"흥, 딱히 신경쓴 건 아니야. 항상 이렇게 입고 다닌다. 오랜만에 본가에 온 김에 친구들을 좀 만났지."
"그 녀석도?"
"치료 겸 외국 유학. 여름에 국내 잠깐 들어왔을 때 봤다. 네놈은 이 근처에 사니까 친했던 녀석들도 자주 만나겠군? 학교도 종종 갈 수 있을 거고."
"뭐, 그럭저럭. 동생 데리고 종종 라이브 보러가는 정도? 칸자키는 몇 번 봤어."
"칸자키는 잘 지내나? 이번에 와서 칸자키도 만나고 싶었는데 집안일 때문에 바쁜 것 같더만."
"그런 것 같더라. 짜식, 의젓하게 선배 노릇을 하고 있더만."
"칸자키가? 역시... 그 녀석은 하면 되는 놈이었으니까. 왠지 뿌듯하군. 학교 다닐 적 생각도 좀... 나고."
케이토가 말끝을 흐리며 쿠로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케이토를 돌아본 쿠로가 살짝 웃었다.
"왜 그래. 즐거웠잖아, 힘든 일도 분명 있긴 했지만."
"그랬지."
"너랑 칸자키랑 함께 홍월로 지냈기 때문에 마지막 일 년은 정말 즐거웠어. 좋은 동료를 만나서, 무대에도 서고..."
쿠로의 말을 듣던 케이토가 눈을 내리깔았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쿠로가 말했다.
"칸자키가 널 엄청 보고싶어했는데."
"흠, 내일 화과자라도 사 들고 칸자키네 집에 서프라이즈로 가 봐야 하나. 나도 두어 번 통화를 하긴 했거든. 칸자키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린 케이토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쿠로의 옆얼굴을 보았다. 말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던 쿠로가 시선을 느끼곤 케이토와 눈을 마주쳤다.
"왜?"
"아니, 아무 것도."
케이토가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다시 찬 바람이 불었다. 좁혀지지 않는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케이토는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꽉 쥐었다. 걷느라 종이컵 안의 내용물이 흔들리면서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온기를 그의 차가운 손에 전했다. 쿠로에게서 먼 손으로 음료를 바꿔들며, 케이토의 미지근해진 손이 허공을 잠시 헤맸다. 그 손이 도착한 곳은 그가 입은 긴 코트의 호주머니 속이었다.
"키류."
"응?"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지?"
"나야 뭐, 그럭저럭. 너는 대학 재밌냐?"
"나도... 그럭저럭이다. 힘들긴 하지만 재밌기도 하고. 네 동생은 잘 지내나? 아버님은 아직도 출장 많이 가시고?"
질문을 들이대듯 쏟아낸 케이토를, 쿠로가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렇지 뭐."
"그렇군."
케이토가 조금 굳은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저쪽으로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야에 들어온 전철 역을 본 쿠로가 그제야 알아차린 듯 말했다.
"어이쿠, 이거 우리 집 근처까지 와 버렸네. 너 어디 가는 길이었냐? 여기까지 걸어와도 괜찮아?"
"아, 상관없다.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었으니까. 전차를 타고 돌아가면 돼.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나머지 여기까지 따라와버렸군. 구제불능이다, 정말. 그럼, 조심히 들어가라."
"그래, 또 보자."
손을 한 번 들어서 인사한 쿠로가 점점 멀어져갔다. 돌아보지 않는 그를, 그가 저 멀리 골목 귀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케이토는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길에는, 케이토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찬 공기를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길게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표정이 무너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다시 찬 바람이 불었다. 음료가 든 종이컵을 꼭 쥐었다.
음료는 그의 떨리는 숨소리를 가라앉힐 수 있을 정도로 차게 식어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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