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는.. 주제 뭐였지
아 주제는 "영웅/악당" 이었습니다.
만우절 AU에서 백만광년 떨어져버린 무언가으 ㅣ번데기 설정입니다...
등장하는 전투기/정찰기는.. 우주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기체라 합시다. 미래기술 미래기술(?
사망 소재가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일단 주의해주세요!
또 하루가 밝았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오늘도 아침 조깅을 했다. 조깅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조깅 시작점에 있는 나무에 한 획을 긁어 표시를 남겼다. 다섯 획 한 묶음짜리가 두 개째. 오늘은 조난당한지 10일째다.
자칭 혁명군이라는 놈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투기의 어딘가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그대로 하스미 케이토의 일대기가 완결되는 줄 알았다. 교신은 끊겼고, 조종 장치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서서히 지구 쪽으로 추락했다. 그대로 죽을 거라 생각했는지 혁명군에서는 아무도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비상 탈출 장치마저 미사일을 맞아 고장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본능은 목 위에 달린 것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도 멋대로 움직였다. 이미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고, 또 많은 것을 잃었기에 더 이상 삶에 욕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삶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직 내가 살아서 속죄해야할 것들이 남아서인지 몰라도 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전투기는 안전한 각도로 바다에 내려앉았다. 다행히 물이 새는 곳은 없었다. 그대로 조금 표류했더니 어느 해안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있는 이 섬이다.
이 섬은 그리 큰 크기는 아니다. 부서지지 않은 시계를 켜 놓고 해변을 따라 걸었을 때,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지상에 있는 아군의 거점이 꽤 쌀쌀했던 것 같은데, 이 섬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로 덥다. 해가 진 이후에도 더위는 쉬이 가시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적도 부근에 있는 섬인 것 같다. 해변을 걸으며 보이는 것이 없는지 열심히 찾아봤지만 저 멀리 작은 암초만이 보일 뿐이었다. 몸을 지킬 무기를 지닌 채 섬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작은 짐승조차 없었다. 그렇다, 나는 망망대해의 무인도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있다. 섬에는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불에 그슬린 돌과 나무의 흔적도 있고, 해변에는 돌로 SOS라는 글자가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쓰러지고 풍화되었지만, 분명 움집이 있었던 흔적도 있다. 내가 여기 떨어지기 전 누군가 여기 표류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 참 기막힌 우연이군. 이 작은 무인도에 내가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손님이었을 줄이야.
그런데 먼저 있던 그 녀석은 어떻게 탈출한 것인가. 여기서 죽었다면 어딘가에 시체나 백골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인데, 그런 것은 움집 주변부터 샅샅이 뒤져봐도 없다. 뗏목을 만들어서 탈출했다기엔, 밑동만 남은 나무들이 별로 없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구조되었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녀석이군. 평소에 착한 일만 하고 살았나. 배도 지나다니지 않고 하늘에도 갈매기만 날아다니는 이런 망망대해의 어딘가에 있는 작은 섬에서 발견되기도 힘들 텐데.
조깅 후 스트레칭까지 마친 나는 모래사장에 벌렁 드러누웠다. 전투기 안에 있던 비상식량은 바닥을 보인지 오래. 나무열매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다. 전투기는 시동조차 걸리지 않는다. 비상 전원으로 시계와 방위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교신하는 장치는 박살이 났다. 파손된 부분은 장비 없이는 고칠 수 없고, 내게는 적절한 장비가 없다. 교신 장치가 박살이 났기 때문에 우주의 기지나 지상의 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찌저찌 열흘을 버티긴 했지만, 오래 버티긴 힘들 것이다.
그런가, 나는 벌을 받은 건가. 무인도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난날 했던 살생들을 뉘우치며 서서히 풍화되는 최후를 맞게 된 건가. 그때 전투기가 완전히 폭발해서 우주 공간에서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지 않는 대신 서서히 죽어가게 된 것인가. 파란 하늘엔 흰 구름만이 잔잔히 흘러가고 있다. 눈을 감았다. 이것이 내게 내려진 마지막 형벌이라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혼돈 속의 사회를 바로잡고 싶었다. 우주로 진출한 어중이떠중이 사이에서 질서를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무력이라는 수단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지적당했을 때 물러나서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을 했어야 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결국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고 우리가 그 정점에 섰고, 정의가 되었지만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여러 세력들이 동맹을 맺고 ‘혁명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악의 축이 되었다.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놈들을 무력으로 찍어 누르려 했지만 처참히 패하기를 여러 번.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그들에게 그렇게 했듯,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았다.
‘……키류.’
문득 떠오른 이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와 했던 마지막 교신이, 그의 비명이 지금도 생생히 귓가에 맴돈다. 키류, 나의 자랑, 나의 사랑,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죄. 평화롭게 살던 녀석을 지옥으로 끌어들인 것도, 함께 죄를 짊어지게 된 것도, 그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시작된 사랑도, 모두 순전히 나의 죄다. 그 죗값을, 나는 너를 잃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런 식으로 받고 있는 것인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그와 교신이 끊기던 순간에도, 두 번 다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물샘이 말라버린 것인지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또한 형벌의 하나인 것인지……
“……음?”
다시 눈을 뜨고 본 하늘에는 낯선 것이 선회하고 있다. 섬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다.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지만, 곧 절망에 빠졌다. 저것은 적군의 정찰기다. 해변에 있는 내 전투기를 봤다면 곧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점점 고도를 낮추는 그것을 보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닷가에 정박할 때까지 해변은 미사일 하나 닿지 않고 잠잠했다. 총으로 쏘려는 속셈인가. 마른 침을 삼키며 정찰기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키, 키류……!”
“오랜만이야, 하스미. 역시 너였구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분명히 그건,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키류의 목소리였다. 혁명군의 옷을 입고,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그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온 몸이 떨린다. 이내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겼다. 그가 내 앞에 서 있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서, 그리고 미안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어, 어떻게…….”
“말하자면 길어. 그보다 왜 팬티바람이냐?”
“……더, 더워서…….”
* * *
내 조종석에 널어두었던 슈트를 걸치고, 그와 함께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 그에게서 그때 그 전투에서 교신이 끊긴 이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폭발음이 들린 이후에 그의 전투기는 힘없이 지구 쪽으로 추락했고, 그는 필사적으로 착륙을 시도하다가 바다에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리고 서서히 침몰하는 전투기에서 탈출해 헤엄쳐서 이 섬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섬에 남은 흔적들은……”
“맞아, 내가 남긴 거야. 그나저나 나도 여기서 다 벗고 지냈는데, 나리도 그럴 줄은 몰랐네.”
“슈트를 입었다간 더워서 말라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까지 체면을 차릴 필요는 없으니까.”
“내 앞이 아닌데도 홀딱 벗다니, 설마 다른 사람한테도…….”
“아니야, 키류.”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의 한쪽 눈을 가린 안대에 시선이 간 순간 더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내게는 오직 네놈뿐이었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한 날 이후로 나는…….”
“나도 마찬가지야.”
무릎 위에 얹어진 내 손을 잡은 그가 자신의 안대를 맨 쪽 뺨으로 그것을 가져갔다. 안대 위로 흘러내린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보고 싶었어. 한쪽 눈이라는 목숨값을 지불하며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로, 쭉.”
“…….”
“그래서 찾아온 거야. 네가 격파된 상황이 내 상황이랑 비슷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것도 아닌 정찰기를 몰고 나왔지. 그리고 기적적으로 너랑 이렇게 다시 만났고.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이건, 기적이라고 해야겠지? 네가 이 섬의 세 번째 손님이 되다니…….”
“세 번째라고?”
그가 씩 웃었다.
“첫 번째로 여기에 떨어졌던 녀석이 날 구해줬어. 그 녀석은 연료가 떨어져 불시착했을 뿐이라 본부랑 연락이 되어서 금방 구조가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때의 추억에 잠겨 이 위를 지나치던 도중에 내가 돌을 옮겨 만든 SOS라는 글자를 발견했던 거지.”
“그런…….”
“녀석은 혁명군 소속이었고, 나를 구조해서 혁명군으로 데려갔어. 나를 가두어서 고문하거나 전장에 출격시키지 않는 대신 비행기를 정비하는 일을 주더라고. 그래서 줄곧 각종 고철들을 고치면서 살았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리지 못한 채.”
“이쪽의 정보를 넘겨주었나?”
“아니, 딱히 안 묻던데.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추궁하면서 고문했더라도 아무 것도 안 말했을 거야.”
“왜지? 더 이상 이쪽에 의리를 지키지 않아도 됐지 않은가. 고통스러운 일에서, 내게서 해방되었으니까…….”
내 어깨를 잡아 자신과 마주보게 한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흘린 정보로 네가 고통스러워지지 않길 바랐으니까.”
“키류…….”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너희 기지까지 데려다 줄게.”
“하지만 네놈, 혁명군의 정찰기를 몰고 혼자 적진으로 돌진해도 괜찮은가.”
“간부를 태우고 있다고 하면 공격하진 않겠지.”
“나를 생포해서 너희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
“네가 곤란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가 내 손목을 잡고 당기는 바람에 나는 일어서야만 했다. 여러 가지 의문을 품은 채 그의 정찰기에 올라탔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같이 한 기체에 타는 것이. 첫 전투를 하기 전, 그와 함께 팀을 짜고 비행 훈련을 하던 시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정찰기는 해변을 달려 이륙했다. 열흘간 지냈던 섬이 점점 멀어져갔다. 앞좌석에 앉아 능숙히 조종을 하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키류, 나를 데려다 주면서 다시 이쪽으로 올 생각은…….”
“없어. 난 곧바로 돌아갈 거야. 멋대로 정찰기를 타고 나오기도 했고, 다시 너희 쪽에 투항해도 내가 저쪽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날 가만두지 않겠지. 너는 그렇지 않아도, 네가 소속된 그곳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의심이 쓸데없이 흘러넘치는 족속이니까.”
“…….”
반박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들의 방식이었고, 결국 우리가 악으로 몰리게 된 이유니까.
“적군의 정찰기를 순순히 보내줄 거라 생각하나?”
“그 놈들이야 날 쏘려고 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네가 막아줄 거라 믿어.”
그가 뒤를 돌아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나는 그럴 것이다. 간부의 권한으로, 그가 멀리 달아날 때까지 발포하지 못하도록 명령할 것이다. 그렇게 너를, 내 사랑을 영영 보내줄 것이다. 그래, 이제는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야지. 내 욕심만으로 너를 붙잡을 수는 없다. 너는 네 자리에서, 나는 내 자리에서 살아야 한다.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며 살겠지만. 서글픈 마음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제 다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겠지. 물밀듯이 밀려드는 그와의 기억들을 떠올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아군의 우주기지가 보였다. 키류는 말없이 조종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거리면 충분히 교신을 할 수 있는데……!
“키류, 교신을……”
순간 펑, 하고 어딘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 우리 측 정찰기가 기지 주변을 정찰하다가 뒤에서 공격한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교신을 할 생각을 않고 오로지 전진할 뿐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벌떡 일어나 계기판의 교신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키류! 얼른 교신을…… 윽!”
펑, 하고 다시 폭발음이 들리며 기체가 흔들렸다. 중심을 잃은 나는 구석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그를 부르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가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키류!”
“하스미…….”
비틀거리는 내게 다가온 그가 나를 안았다. 잔탄들이 기체를 때리는 소리가 시끄러운 속에서 나는 버둥거리며 그에게 고함쳤다.
“놔! 이러고 있다간 우리 둘 다 죽어!”
“하스미, 사실 나는……”
그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맞닿은 몸으로 전해지는 두근거림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그의 등을 안았다. 마찬가지다, 키류. 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네가 없이 살고 싶지 않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차라리 함께……
끝
좀 유쾌하게 쓰고 싶었는데 주제가 주제다보니까 별로 안 유쾌해짐...ㅜㅜ 아니 내 역량부족인가... 허접쉐키
애덜 근담 태우고 싶어서 죽는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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