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더 걸었으면 길바닥에 주저앉았을 것 같은 더위다. 키류가 보내준 집 주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음, 여긴가.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잠깐만 기다리라는 키류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우당탕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이 열리고, 키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미안, 하스미. 당장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꼴이 아니어서 옷을 좀 입느라…….”
말의 끝을 흐리며 머쓱해하던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왜?”
“안 덥냐?”
“물론 덥지.”
“들어와. 잠깐 쉬었다 가.”
안 그래도 더위 타는 양반이 뭘 그렇게 덥게 입고 있담, 이라고 중얼거리며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드러난 그의 옷차림을 보니 그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벗고 있었던 건가?”
“덥잖아. 집에 아무도 없고.”
방금 옷장에서 꺼내어 입은 듯 접혀 있던 자국이 선명한 반팔 티셔츠와, 허벅지의 반도 덮지 않는 짧은 반바지 차림의 그는 어수선한 집안을 정리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더운 날에도 옷을 만들고 있었던 건지, 거실에는 옷본과 천 조각, 재봉도구 등등이 널려 있었다.
“아, 이건 좀 그냥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만들어보고 있었어. 금방 치울게.”
“아니, 뭐, 괜찮다. 이거나 우선 받아.”
식탁 의자에 앉은 내가 가방에서 드림페스 계획안이 든 봉투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여름 방학이고, 연습도 없는 날이라 키류와 칸자키는 학교에 오지 않았고, 학생회 일이 있어서 학교에 갔던 내가 집에 가는 길에 두 사람에게 전달해 주기로 했다.
“칸자키는?”
“전해주고 오는 길이다.”
“고생하는구만, 체력도 약하면서. 칸자키는 몰라도 난 그냥 부르지 그랬어. 학교에 갔어도 됐는데.”
“이런 더위에 불러낼 만큼 가혹한 리더이고 싶진 않아.”
“나는 이런 더위에 리더를 쓰러뜨리고 싶지 않은데.”
흘겨보니까 씩 웃는다. 이 녀석이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게 말을 받아치게 됐지. 옷본을 정리한 그가 창문을 닫았다. 에어컨을 켜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리모컨이 어디 갔지? 이 뒤로 넘어갔나?”
서랍장 뒤쪽을 살피는 녀석의 포즈가…… 조금 민망하다. 윽, 나도 모르게 그의 오금이 움찔거리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잠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서랍장 밑을 찾아보려는 듯 바짝 엎드린다. 엎드리는 건 좋은데, 어째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거냐. 티셔츠가 흘러서 허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의도적으로 보려던 건 아닌데, 반바지가 짧은데다 통이 넓은 탓에 속옷이 살짝살짝 보이고 있다고. 탈의실에서야 종종 보던 맨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키류…… 손님이 있단 걸 좀 자각해줬으면 좋겠다만.”
“엉? 너랑 나 사이인데 뭐. 그리고 벗은 건 가끔 봤잖아?”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라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마른 침만 삼켰다. 열심히 서랍장 밑을 뒤지던 그가 찾지 못했는지 길게 탄식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나만 집에 있으면 에어컨을 잘 안 켜고 여동생이 와야 에어컨을 켜거든. 항상 여동생이 리모컨을 가지고 있어서 리모컨을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네.”
“아니, 굳이 켜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선풍기 바람만 쐬어도 되고.”
“이 더운 날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야.”
그가 환기를 하기 위해 다시 창문을 열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아득히 들린다.
“더 전달할 건 없어?”
“계획안을 보고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다음 유닛 연습 때 말해줘. 내가 생각한 무대 구성안을 적어서 같이 첨부해 두었으니 참고해도 좋고. 그거 외엔 딱히 없다.”
“오케이. 의상도 생각해봐야겠네. 아, 아이스크림 있는데 먹을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를 열어 아이스바를 건넨 그가 거실 바닥에 털썩 퍼지고 앉았다. 좀, 나도 손님이라는 자각을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편한 자세로 나를 대하고 있잖아. 근육 갈라진 것이 또렷이 드러난 허벅지가 다 보이도록…….
“하스미……?”
“아, 미안.”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녀석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가 무슨 망측한 짓을……. 그런데 이거 좀 딱딱하군. 냉장고에 오래 들어있던 건가. 베어 물기가 힘들 것 같아서 아이스바를 입 안에 넣고 조금 녹였다.
“하, 하스미.”
“왜?”
“그거 그렇게 안 먹어도 금방 녹을 것 같은데…….”
“…….”
아니, 내가 아이스크림 먹는데 왜 네놈이 부끄러워하는 거지? 이상한 녀석이군. 자기 손에 든 거나 신경을 썼으면 좋겠는데. 선풍기 바람을 맞은 그의 아이스바는 손잡이에 가까운 부분이 녹아서 손을 타고 흐르고 있다. 손목과 팔꿈치를 타고 허벅지까지…… 아니, 난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지? 더위를 먹은 건가?
“키류! 흐른다!”
“엇?”
“움직이지 마, 티슈 가져다 줄 테니까!”
멍하니 보고 있던 나도 이상하지만, 저 녀석은 왜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팔을 타고 흐르는 걸 자각도 못하고 있담? 급히 티슈를 찾았다. 몇 장 뽑아 들고 있는 김에 닦아주려고 다짜고짜 허벅지에 손을 가져갔다.
“나리, 거긴 내가 할 테니 손이랑 팔부터……!”
“아, 그, 그래.”
허둥지둥하며 그의 다리를 짚은 채로 팔을 닦아주었다. 손에 묻은 것도 닦아주려 하는데, 내가 들고 있는 내 아이스크림이 뒤늦게 생각났다. 그가 이상하게 움찔거리고 있다 싶었는데, 내 것이 녹아 내 손과 그의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도로아미타불이군.
“하, 하스미. 저기, 일단 날 좀 놔줘…….”
얼굴이 새빨개진 그가 아이스크림이 묻지 않은 쪽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나도 허둥대며 티슈를 더 가지러 가려다가, 무심코 그의 다리 사이를 보게 되었다.
“…….”
“…….”
그가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마치 나 때문이라는 듯이 나를 원망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고간이 우뚝 솟은 채로 말이다. 덩달아 내 얼굴도 확 빨개졌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외면하려고 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간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씰룩거렸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서로 당황한 채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정말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면, 그런 거라면…….
“채, 책임지겠다.”
“……!”
내가 해결하는 것이 도리겠지. 다리에 흘러 끈적거릴 아이스크림도, 더 은밀한 곳의 문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