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쿠로케이] restart
쿠로케이 주간 전력 주제가 웃음이길래 후닥닥 써봤는데 지각잼ㅋ
쓰고보니 이게 쿠로케이인지 쿠로+케이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쿠로케이라고 빡빡우겨봄
과거날조 주의
별로 안 밝은 내용 주의
또 싱겁게 끝났다. 지난 서른 번의 무대가 그랬듯이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상대방이 기권해 버려서 무대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물론 그것이 하스미 도련님이 예상한 전개였겠지만 말이지, 서른 한 번이나 무대에 올라서 싱겁게 승리를 받아내는 건 좀 시시하다고. 물론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난다는 점은 좋지만...
"키류."
"엉? 하스미 나리께서 이 험한 전장까지 행차를 하시고 말야, 어쩐 일이래?"
"비꼬지 마."
이번 무대까지 합쳐 서른 한 번의 무대가 펼쳐지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던 분이 행차를 하셨다. 퀭한 걸 보니 학생회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온 것 같군. 잘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일이 많은가보다. 하기야, 학생회장은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상태니까 부회장인 이 녀석이 총 책임자가 되었겠지.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여기까지 몸소 찾아왔담?
"무슨 일 있냐? 여태 코빼기도 한 번 안 비추더니."
"섭섭한 소릴...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마. 더 이상 용왕전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
"뭐?"
"오늘 용왕전에 이겨서 쌓은 승점으로 '홍월'은 'fine' 다음 가는, 교내 2위의 유닛이 되었다. 키류, 그 동안 수고했다. 이 촌극을 서른한 번이나 해 주어서."
"..."
조금 얼떨떨하군. 그 어딘가 찝찝한, 무대같지 않은 무대를 더 이상은 안 해도 된다는 건 후련하지만. 잠깐, 용왕전이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하스미는 더 이상 무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는 건가.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냐니?"
"나는 이제 홍월을 떠나면 되는 건가? 힘이 필요없어졌으니 재능 있는 다른 녀석들과 새로 홍월을---"
"네놈은 그러기를 원하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덩달아 우뚝 섰다.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빤히 본다.
"키류, 다시 묻겠다. 네놈은 나를 떠나기를 원하나?"
"..."
"만약 그러기를 원한다면 미련없이 보내줄 것이다. 애초에 네놈은 나 때문에 붙들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지."
이거 목줄 풀린 애완동물이 된 느낌이군. 온갖 간계를 치밀하게 짜는 하스미 녀석이지만 지금의 말에 다른 속셈은 없어 보인다. 나는 어떡하면 좋지? 홍월을 떠난다, 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여길 떠나면 갈 곳도 없거니와, 이 녀석처럼 나를 필요로 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하스미 넌 어떻게 생각하냐?"
"전적으로 네 의사에 따를 생각이다. 네가 나가겠다면 막지 않고 네놈이 앞으로 교내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도울 것이다. 네놈은 나를 도왔으니. 나와 계속 홍월로 활동하겠다면 그럴 것이고."
"나는..."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내가 이 녀석을 떠나도 이 녀석이 나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교묘한 술수를 쓰는 녀석이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나를 돕겠다는 말은 진심이겠지. 그렇게 하스미가 내 편의를 봐 주어서 내 생활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시 하스미를 만나기 전처럼 그런 상태로 가라앉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네놈과 함께 하겠다."
"그런가... 한 숨 돌렸군."
안도하는 녀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런데 어째서지? 용왕전이 끝났다며.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거 아닌가?"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네놈과 내게 당한 녀석들이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고, 이런 일을 지금껏 기꺼이 해준 네놈을 계속 내 곁에 두고 케어해줘야 한단 의무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오후 수업 시작 전 예비종이 울렸다. 하스미가 다시 교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마음도..."
"뭐라고?"
종소리에 섞여 녀석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잘 들리게 말하던 녀석이 갑자기 답지않게 중얼거리는 건 대체 뭐람!
"못 들었는데, 뭐라고 했냐?"
"별 거 아니다. 그보다 용왕전도 막을 내렸으니 수업 끝나고 뭐라도 먹으러 가는 건 어때?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수고했다는 의미로 말이지."
남자끼리? 이런 제안은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군.
"그거야 뭐 상관없지만... 넌 내가 어떻게 용왕전을 하는지 한 번이라도 보고 말하는 거냐?"
"심술궂은 말 하지 마라.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고, 행여 네놈에게 덤비는 겁을 상실한 놈이 있어서 다치기라도 할까봐 전화기를 든 채로..."
"그래그래, 비싼 용병이 상하면 안 되니까 고용주로서는 조마조마했겠지."
"심술궂은 말 하지 말래도. 용병 따위가 아냐, 네놈은 내 동료다, 키류."
"흥, 역시 달변가답게 말은 잘 하는구만."
내 말에 교실을 향해 걷던 그가 갑자기 멈춰섰다. 윽, 하마터면 녀석과 부딪칠 뻔했다. 의아하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녀석은 이내 옅게 웃었다.
"네놈, 드디어 웃었다."
"뭔 말이야?"
"키류 네놈 그렇게 밝은 표정, 처음 본다고. 내가 홍월을 권유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는데 말이지. 뭐 어쨌든, 수업 끝나고 보자고. 점심 먹었다고 졸지 말고!"
그렇게 말을 끝낸 녀석은 내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자기네 반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그렇게 안 웃었었나...? 하지만 하스미, 네놈도 지독하게 안 웃었잖아. 라이브하우스에서도, 아니, 그 전에 의뢰를 맡기거나 교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도 지금처럼 밝게 웃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고. 무엇에서 비롯한 웃음인지 몰라도 저렇게 밝은 표정을 보니 나도 괜시리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나도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도 계속 홍월이란 소리군... 하스미와 함께. 아직은 소속되어 있을 곳이 있단 사실에 마음이 좀 놓인다.
'아차, 노트 돌려주는 걸 깜빡했군.'
하스미에게서 빌린 노트를 점심 시간에 돌려줬어야 했는데 잊어버렸다. 어차피 지금 저쪽 반도 이 과목 수업이 아닐 테니 괜찮겠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문득 밝게 웃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계속, '동료'로서 녀석과 함께한다면 그런 얼굴을 더 볼 수 있는 걸까. 윽, 내가 무슨 근질근질한 상상을 하는 거람.
-끝-